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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군 (독일 국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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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7군 (독일 국방군)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국방군의 야전군으로,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남부 집단군에 배속되어 소련과 전투를 벌였다. 우만 전투와 키예프 전투에서 소련군을 포위하여 많은 포로를 잡았으나, 모스크바 전투를 앞두고 공세를 중단했다. 1942년 청색 작전에서 코카서스 지역을 담당했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영향으로 쿠반 교두보로 후퇴했다. 이후 크림 반도로 이동했으나, 세바스토폴 함락으로 큰 피해를 입고, 종전 직전인 1945년 5월 7일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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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군 (독일 국방군)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개요
명칭제17군
군사 정보
소속[[File:Heer - decal for helmet 1942.svg|16px]] 독일 육군 ([[File:Balkenkreuz.svg|16px]] Wehrmacht)
종류야전군
창설일1940년 12월 20일
해체일1945년 5월 7일
담당 지역동부 전선
주요 전역동부 전선
지휘관
주요 지휘관카를-하인리히 폰 스튈프나겔
헤르만 호트
리하르트 루오프
에르빈 예네케
카를 알렌딩어
프리드리히 슐츠
빌헬름 하세
이미지
1943년 6월, 남부 러시아의 독일군
1943년 6월, 남부 러시아의 독일군

2. 역사

1941년 6월 22일, 독일 국방군바르바로사 작전을 발동하여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했을 때, 제17군은 남부 집단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제17군은 소련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며, 제1기갑군과 함께 우만 전투에서 우크라이나 중부의 소련군을 포위하여 약 10만 명의 포로를 잡았다.[1] 이후 키예프 전투에 참가하여 다시 소련군을 포위, 약 45만 명의 소련군 장병을 포로로 잡았지만, 세묜 부됸니 원수를 생포하는 데는 실패했다.[1] 키예프 전투 이후, 독일군의 목표는 모스크바로 이동하여 모스크바 전투가 시작될 예정이었고, 남부 집단군은 1941년의 남은 기간 동안 대규모 공격을 중단했다.

1942년 독일군의 전략은 남부 전선에서의 하계 공세인 청색 작전이었다. 청색 작전의 목표는 1단계에서 돈강 서안의 소련군을 격파하고, 2단계에서는 공세 축을 2개로 나누어 스탈린그라드 북쪽에서 볼가강에 도달하고, 코카서스 반도를 남하하여 바쿠 유전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1942년 7월 23일, 남부 집단군은 코카서스를 담당하는 A 집단군과 볼가강을 목표로 하는 B 집단군으로 분할되었다. 제17군은 제1기갑군, 제11군 등과 함께 A 집단군에 배속되었다. 제17군은 코카서스에서의 공세 주력 부대였지만, 전선 우익을 담당했다. 방어에 적합한 산악 지형, 강력한 소련군의 저항, 연료 부족, 스탈린그라드에서 고전하는 B 집단군에 대한 전력과 자원의 우선 할당 등으로 인해 진격이 순조롭지 않았다. 8월 말에는 브란덴부르크 연대가 마이코프 유전을 점령했지만, 유전 설비는 사전에 소련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어 석유를 얻을 수 없었다. 11월 하순에는 코카서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 같은 시기 소련군의 반격으로 B 집단군의 제6군 전부와 제4기갑군의 일부는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되었고, A 집단군은 쿠반 교두보를 제외하고 돈강 선까지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제17군은 쿠반 교두보를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는 장래의 코카서스에서의 공세 재개를 위한 히틀러의 강력한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육상 보급로가 끊긴 후에는 매일 1000ton의 물자가 공중 케이블카를 통해 케르치 해협을 건너 쿠반 교두보의 제17군에 보급되었다.[1]

1943년 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군의 공세로 우크라이나에서 소련군이 서쪽으로 진격하면서, 10월까지 제17군은 쿠반 교두보에서 케르치 해협을 건너 크림 반도로 후퇴해야 했다. 1943년 11월, 페레코프 지협이 차단되어 제17군은 크림 반도에 고립되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크림 반도를 잃으면 플로이에슈티 유전이 소련군 폭격기의 행동 반경 안에 들어가고, 중립국인 터키에 나쁜 정치적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하여 제17군의 해상 퇴각을 금지했다.[1] 1943년 안에 소련군은 케르치 해협을 건너 크림 반도에 상륙하기 시작했고, 1944년 4월 10일에는 소련군이 시바시로 이동하여 페레코프 지협을 공격, 제17군을 세바스토폴로 몰아넣었다. 제17군은 세바스토폴 사수를 명령받았지만, 소련군의 빠른 진격으로 방어 준비는 부족했다.

1944년 5월 13일, 세바스토폴 요새는 함락되었다. 마지막 단계에서 해상 철수 작전이 진행되었지만, 제17군은 거의 모든 중장비를 잃었고, 병력 손실은 약 65,100명에 달했다.[1] 이후 제17군은 재편성되어 바우첸 전투 등 동부 전선에서 계속 싸웠다.

1945년 1월 1일, 제17군(당시 A 집단군 소속)은 제78, 제320, 제544, 제545 국민척탄병사단과 제359, 제371 보병사단을 포함하여 총 6개 사단, 57,088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45년 5월 7일, 빌헬름 하세 보병대장 지휘 하에 제17군은 항복했다.

2. 1. 바르바로사 작전 (1941년)

1941년 6월 22일, 독일 국방군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공했을 때 제17군은 남부 집단군의 일부였다.[1] 7월 1일부터는 헝가리 "기동군단"(''Gyorshadtest'')이 제17군의 지휘를 받았다.[1] 제17군은 제1기갑군과 함께 우만 전투에서 중앙 우크라이나의 소련군을 포위하여 약 10만 명의 소련군 포로를 획득했다.[1] 이후 제17군은 키예프 전투에 참여했다.[1]

2. 2. 청색 작전과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1942년, 남부 집단군은 청색 작전으로 알려진 독일의 러시아 하계 공세를 이끌 예정이었다. 제17군은 제1 기갑군이 돈 강을 향해 진격할 때 측면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1942년 8월, 아돌프 히틀러는 남부 집단군을 A 집단군B 집단군의 두 개의 새로운 집단군으로 분할했다. 제17군은 제1 기갑군, 제4 기갑군과 함께 A 집단군에 소속되었다.

B 집단군스탈린그라드를 향해 진격하는 동안, A 집단군과 제17군은 코카서스 전투로 알려지게 될 코카서스 유전을 공격했다. 그러나 12월,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군을 포위하자 A 집단군은 남부 러시아에서 철수했지만, 제17군은 쿠반 교두보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히틀러는 1943년 봄에 코카서스를 거쳐 페르시아로 진격하기 위해 케르치 해협을 가로지르는 3마일 길이의 도로 및 철도 교량을 요구했지만, 하루 1,000톤의 수송 능력을 갖춘 케이블 철도(공중 케이블카)가 7월 14일에 가동되어 쿠반 교두보에서 제17군의 방어에 필요한 충분한 역할을 수행했다. 빈번한 지진으로 인해 막대한 양의 특수 강화 거더가 필요했고, 그들의 수송은 크림 반도로의 군수 물자 수송을 줄였다.[1]

1942년 독일군의 전략은 남부 전선에서의 하계 공세인 청색 작전이었다. 청색 작전의 목표는 1단계에서 돈강 서안의 소련군을 격파하고, 2단계에서는 공세 축을 2개로 나누어 스탈린그라드 북쪽에서 볼가강에 도달하고, 코카서스 반도를 남하하여 바쿠 유전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1942년 7월 23일, 남부 집단군은 코카서스를 담당하는 A 집단군과 볼가강을 목표로 하는 B 집단군으로 분할되었다. 제17군은 제1기갑군, 제11군 등과 함께 A 집단군에 배속되었다.

제17군은 제1기갑군과 함께 코카서스에서의 공세 주력 부대였지만, 전선 우익을 담당했다. 방어에 적합한 산악 지형, 강력한 소련군의 저항, 연료 부족, 스탈린그라드에서 고전하는 B 집단군에 대한 전력과 자원의 우선 할당 등으로 인해 진격이 순조롭지 않았다. 8월 말에는 브란덴부르크 연대가 마이코프 유전을 점령했지만, 유전 설비는 사전에 소련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어 석유를 얻을 수 없었다. 11월 하순에는 코카서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

11월 하순 소련군의 반격으로 B 집단군의 제6군 전부와 제4기갑군의 일부는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되었고, A 집단군은 쿠반 교두보를 제외하고 돈강 선까지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제17군은 쿠반 교두보를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는 장래의 코카서스에서의 공세 재개를 위한 히틀러의 강력한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육상 보급로가 끊긴 후에는 매일 1,000톤의 물자가 공중 케이블카를 통해 케르치 해협을 건너 쿠반 교두보의 제17군에 보급되었다.

2. 3. 쿠반 교두보와 크림반도 전투 (1943년 ~ 1944년)

1943년 10월까지 제17군은 쿠반 교두보에서 케르치 해협을 건너 크림 반도로 후퇴해야 했다. 소련군우크라이나 남부에서 독일군을 밀어냈다. 1943년 11월, 소련군은 페레코프 지협을 통해 제17군의 육상 연결을 차단했다. 히틀러는 제17군의 해상 탈출을 금지했는데, 크림반도를 잃으면 루마니아 정유소가 소련군 폭격기의 공격 범위 안에 들어가고, 중립국 터키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다.[1] 그러나 1943년 말까지 소련군은 케르치 해협에 병력을 상륙시키기 시작했다.

1944년 4월 10일까지, 시바시 부근에서 병력을 이동하고 페레코프 지협 공격과 함께 제17군은 세바스토폴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 (''Oberkommando der Wehrmacht'', OKW)는 1941년부터 1942년까지의 전투처럼 세바스토폴을 요새로 지키려 했다. 그러나 세바스토폴의 방어 시설에 대한 부적절한 수리로 인해 이는 불가능해졌고, 1944년 5월 9일, 세바스토폴은 전투가 시작된 지 한 달도 안 되어 함락되었다.[1]

세바스토폴 해방 전투 중 포로로 잡힌 제17군 부상병


최종 단계에서 해로를 이용한 철수 작전이 진행되었지만, 제17군은 거의 모든 중장비를 잃었고, 장병의 손실은 약 65,100명이었다.

2. 4. 동부 전선에서의 후퇴 및 종전 (1944년 ~ 1945년)

1943년 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군의 공세로 우크라이나에서 소련군이 서쪽으로 진격하면서, 1943년 10월까지 제17군은 쿠반 교두보에서 케르치 해협을 건너 크림 반도로 후퇴해야 했다. 1943년 11월, 페레코프 지협이 차단되어 제17군은 크림 반도에 고립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크림 반도를 잃으면 플로이에슈티 유전이 소련군 폭격기의 행동 반경 안에 들어가고, 중립국인 터키에 나쁜 정치적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하여 제17군의 해상 퇴각을 금지했다.[1]

1943년 안에 소련군은 케르치 해협을 건너 크림 반도에 상륙하기 시작했고, 1944년 4월 10일에는 소련군이 시바시로 이동하여 페레코프 지협을 공격, 제17군을 세바스토폴로 몰아넣었다. 제17군은 세바스토폴 사수를 명령받았지만, 소련군의 빠른 진격으로 방어 준비는 부족했다.

1944년 5월 13일, 세바스토폴 요새는 함락되었다. 마지막 단계에서 해상 철수 작전이 진행되었지만, 제17군은 거의 모든 중장비를 잃었고, 병력 손실은 약 65,100명에 달했다. 이후 제17군은 재편성되어 바우첸 전투 등 동부 전선에서 계속 싸웠다.

1945년 1월 1일, 제17군(당시 A 집단군 소속)은 제78, 제320, 제544, 제545 국민척탄병사단과 제359, 제371 보병사단을 포함하여 총 6개 사단, 57,088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45년 5월 7일, 빌헬름 하세 보병대장 지휘 하에 제17군은 항복했다.

3. 전쟁 범죄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 재임 기간(1941년 10월 5일 ~ 1942년 4월 19일) 동안, 제17군은 유대인 학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 호트는 부하들에게 "유대인에 대한 가혹한 처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2] 그는 유대인을 "볼셰비즘의 지적 지지자", "살인적인 조직의 전달자", "게릴라의 조력자" 등으로 규정하며 학살을 정당화했다.[2] 호트는 발터 폰 라이헤나우가 발표한 가혹 명령을 지지했다.[2]

Vernichtungskrieg|멸절전de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던 호트의 지휘 아래, 제17군 부대는 통제 지역 내 유대인 색출 및 살해에 가담했다.[1]

4. 역대 지휘관

취임해임계급(당시)이름
1940년 12월 20일1941년 10월 4일보병대장카를하인리히 폰 튈프나겔
1941년 10월 5일1942년 4월 19일상급대장헤르만 호트
1942년 4월 20일1942년 5월 31일상급대장한스 폰 잘무트
1942년 6월 1일1943년 6월 24일상급대장리하르트 루오프
1943년 6월 25일1944년 3월 1일상급대장에르빈 예네케
1944년 3월 2일1944년 3월 31일보병대장페르디난트 쇠르너
1944년 4월 1일1944년 4월 28일상급대장에르빈 예네케
1944년 5월 1일1944년 7월 25일보병대장카를 알멘딩거
1944년 7월 26일1945년 3월 30일보병대장프리드리히 슐츠
1945년 4월 1일1945년 5월 7일보병대장빌헬름 하세


참조

[1] 서적 Inside the Third Reich
[2] 서적 Die Ostfront 1943/44: Der Krieg im Osten und an den Nebenfronten Deutsche Verlags-Anstalt
[3] 서적 Die Militärische Niederwerfung der Wehrmacht Deutsche Verlags-Ansta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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